|
|
|
본고는 2007년 4월 16일 도쿄대학 출판회에서 간행된 『고전 일본어의 세계 –한자가 만드는 일본』(도쿄대학 교양학부 국문・한문학부회 편)「제I부 고대 문자의 문화세계 형성 –동아시아의 고전고대」의 초고로서, 본문에 약간의 상이가 있으며 도판도 생략되었다. 전모에 대해서는 전게서를 참고 바람.
|
|
|
|
|
|
|
|
문자의 문화세계 형성 −− 동아시아 고전고대 |
|
|
|
고노시 다카미츠[神野志 隆光]
2007/4/16
|
|
|
|
1 문자와 정치
이 열도에, 어느 단계에서 어떻게 문자(한자)가 들어와서 퍼져 나갔는가. 그것은 이 열도의 역사에 있어서, 어떻게 문화세계가 형성되었는가
하는 바로 그 문제입니다. 이 열도,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우회하는 말투로 들릴 지도 모르겠습니다만, 「日本」은,
701년의 다이호료[大宝令→당의 율령을 참고하여 8세기 초에 제정된 일본의 율령]에서 「日本天皇」이라는 형태로, 즉
왕조명으로서 설정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러한 「일본」의 성립과정을 거울삼아 보면, 지금, 어떻게 문자의 세계가 형성되었는가를
말하고자 할 때에, 「일본」이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덧붙여, 「일본」의 성립에 대해서는 졸저
『「일본」이란 무엇인가』고단샤현대신서를 참고해 주십시오).
발굴이 있고 새로운 자료가 발견되거나 하면, 이것이 최초의 문자가 아닌가 하는 식으로 화제가 되기도 합니다만, 그런 식으로 문제를 파악하는
방법이 문자의 본질에서 벗어난 것임을 먼저 확실히 해 두고 싶습니다. 문자처럼 보이는 것이 새겨져 있다고 할지라도,
어쩌다 한 두 글자가 보이는 것만으로는, 문자가 당시 사회적으로 기능했었다고 하는 증거가 될 수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문자가 사회적으로 기능하고 있는지 어떤지 하는 점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말하면, 이 열도의 사람들이 문자를
접했던 것 자체는 기원전부터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문자와 접촉하는 사이에 자연스럽게 문자를 사용하게 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단발적으로 문자를 써 보거나 하는 일은 있었을 수도 있으나, 그것과, 사회에 있어서의 문자라고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문자가 단지 존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사용해야만 하는 것으로서 의미를 가지게 된 것은, 1세기의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이 열도의 사회적
성숙과는 상관 없이, 외부로부터 어쩔 수 없이 가져온 것입니다. 57년에 왜(倭란 중국에서 이 열도의 인종을 칭했던
이름이나, 사실 그 의미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왕이, 후한왕조에 사절을 파견하여 책봉을 받은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책봉이란 중국왕조가 왕으로서 임명하여 군신관계를 맺고 그 지역의 지배를 인정하는 것인데, 그 때 왕임을 인정하는
인수[印綬]를 하사합니다. 후한왕조가 왜왕에게 하사한 것이, 유명한 시가섬[志賀島]출토의 금인[金印]이었습니다. 그리고
왕으로 임명 받음으로써 중국왕조에 대해 조공의 의무를 지게 되는데, 조공 시에 그 인을 사용한 국서를 지녀야만 했습니다.
요컨대, 중국왕조의 영향하에 문자가 왕래하는 상황[문자의 交通] 속에 편입되어, 문자를 사용할 수 밖에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문자의 사용이 시작되었습니다만, 5세기까지는, 이러한 중국왕조와의 관계라고 하는 한정된 범위에서, 즉 사회의 외부에서 사용되었던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열도의 내부에서 문자가 기능했다고 인정할 수 있는 자료가, 5세기까지는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자가 외부에서만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라, 사회 내부에서 기능하여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을, 필자는 문자의 내부화라고
부르고 싶은데, 그 시점은 5세기에 둘 수 있습니다.
A 치바현 이나리다이[千葉県 稲荷台] 고분 출토 「王賜」명 철검, B 사이타마현 이나리야마[埼玉県 稲荷山] 고분 출토 철검(図1→p.5),
C 구마모토현 에타후나야마[熊本県 江田船山] 고분 출토 철도[鉄刀→刀는 한쪽 날의 칼로서, 양날의 칼인 剣과 구분함],
이 세 개의 철도검의 명이 5세기에 있어서의 문자의 내부화를 증명해 줍니다. A는 고분의 연대가 5세기 중엽에서 후반의
이른 시기로 보이며, B에 「辛亥年七月中記」라고 쓰여 있는 「辛亥年」은 471년으로 보여집니다. C에는 B와 같은 이름의
대왕명이 있습니다. 이것들은 지방의 족장에게 하사함으로써 복속관계를 확인하는 것이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 중에 특히 B의 마지막 부분에, 「때마침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돕기 위하여 이 백련의 예리한 검을 만들도록 명하고, 내가 받드는 근원을
기록하도록 하노라」라고 쓰여 있는 점이 주의를 끕니다(「時」아래의 글자는 「吾」같이 보이지만, 「為」라고 보는 설에
따릅니다). 「천하를 다스리는 것을 돕기 위하여 이 여러 번 단련한 검을 만들어 봉사의 유래를 기록케 했다」는 뜻인데,
누가 「천하」를 다스리고 있었느냐 하면, 문중에 보이는 「獲加多支鹵大王」(와카타케루대왕. 雄略天皇에 해당되지 않을까
추정하고 있습니다)입니다. 열도의 왕을 「大王」이라 부르고, 그 다스리는 지역을 「天下」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래 「천하」란 중국황제의 세계를 이르는 말이며, 책봉을 받는 것은 바로 그 세계 속에 편입되는 것임을 뜻했습니다.
자신들의 대왕의 세계를 「천하」라고 하는 것은, 중국의 밖에 있으면서 스스로가 하나의 세계이고자 함을 의미합니다. 그
세계를 조직하는 것을, 문자가(엄밀히 말하면, 레갈리아[regalia→왕권의 상징, 혹은 그것을 지님으로써 정당한 왕임을
증명하는 것]로서 도검을 수여하고, 그 위에 복속관계를 확인하는 문자를 새기는 것에 의해) 떠맡고 있었습니다. 문자의
내부화도, 결국은 정치의 문제였던 것입니다.
더욱이 7세기 후반에는 문자의 내부화가 일거에 진척되어, 열도 전체에 널리 문자가 침투했다고 말해도 될 정도의 상황이 되며, 문자에 의한
행정이 이루어졌음을 단적으로 목간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8세기 초엽에 율령국가를 완성하기에 이르는데,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성문법을 기초로 하여 문자에 의해 운영되는 국가입니다.
요컨대, 문자는 정치의 문제였습니다. 문자의 사용이란 결코 문자를 접하는 과정에서 자연 발생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문자(한자)의
교통을 구축하는 것으로써 곧 국가가 만들어진다―, 그것이 7세기에서 8세기에 걸쳐 단숨에 이룩된, 문자의 문화세계의
형성이었던 것입니다. |
|
|
|
2. 중국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문화세계
지금 생각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문자세계의 형성입니다. 그것은 정치의 문제라고 했습니다만, 한 발 더 나아가 말하자면, 그 문자세계는
고대 동아시아에 있어서 중국을 중심으로 한 하나의 문화세계가, 정치관계를 기반으로 한 문자(한자)의 교통으로 이루어진
세계 속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문화세계가 곧 정치구조로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이 같은 고대 동아시아 세계의 본질에 대해
가장 명확히 제시하는 이는 니시지마 사다오[西島 定生]씨입니다.
니시지마 씨는 한자문화권이라고 하는 문화적 영역이 자연 발생적으로 전파되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그것은 정치적 관계를 기반으로 성립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한자가 전래되어 자기 것으로 취하게 되면, 외교문서의 해설과 작성에 국한하지 않고, 한자를 매개로 하여 중국문화가 광범위하게 수용된다. 후대의
율령의 수용, 유교사상이나 불교사상의 수용 등, 모든 것이 한자를 매개로 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중국문화가
수용 소화되어 이것을 계기로 일본문화가 형성되어 가는 것인데, 그 발단이 되는 한자의 수용사정을 전술한 바와 같이(책봉을
받아서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문자의 교통 속에 편입된다고 하는 것입니다―고노시)이해할 수 있다면, 일본에 있어서의 중국문화의
수용은, 단지 바다 건너 대륙에 선진문화가 존재했기 때문이라고 하기보다는, 수용을 필연화 시킨 국제적 정치사정 및 그에
대응하는 국내적 정치사정이 선행했었다는 점에 유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일본역사의 국제환경』
필자는, 전체가 하나의 문화세계로서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위의 견해를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물론 중국대륙에서 선진적으로 형성되어 있었던 문화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나, 그 연장선에서 공통의 문자(한자), 공통의 문장어(한문)에 의해, 교양의 기반과 가치관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한 문화세계입니다. 고대의 문제로서 생각하기 위해, 1세기부터 9세기까지의 범위를(책봉을 받은 시기부터 당이
멸망한 시기까지 구분해 봅니다) 정합니다만, 이 때 「중국」이나 「일본 」이라는 용어는, 따지고 보면 근대 국민국가의
단위를 내세워 파악하는 것이므로 결코 적절하지 못합니다.
이것을 유럽의 고전고대 세계에 견주어, 동아시아 고전고대 세계라고 칭할 수도 있습니다. 각각의 지역에 고유의 언어가 존재하는 가운데, 그
세계의 공통언어로서 관철하는 한자 한문의 위상은, 유럽의 고전고대 세계에 있어서의 그리스어나 라틴어의 위상과 상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똑같은 교양을 공유하려고 했던 것이므로, 「중국문학」의 「영향」이라고 파악하는 방법도 부적절합니다. 물론 원래부터 아무런 기반도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고유의 문명의 존재는 생각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지금 얘기하는 문자의 세계에 있어서는, 그것과는
별개로, 스스로가 하나의 문화세계에 연결되어 있고자 하는 행위가 존재할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한자의 문화세계 동쪽
끝에서의 로컬 행위로서 이 열도의 문자세계가 존재했었다는 바로 그 점입니다.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은 학습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글자를 어떻게 사용할지는 실제의 용례에 맞게 알고 있어야만 하니까, 한문 서적을 읽는
것은 필수입니다. 또 무언가를 쓴다고 할 때에는 문장으로서의 형태를 배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글자를 가지고 쓴다고 하는
것은, 교양을 몸에 익혀 비로소 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교양은 같은 문화세계에 있음을 보장해 주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
|
|
|
3. 문자학습의 실제
그러면 고대인들이 읽기 쓰기를 했던 현장으로 들어가, 문자 학습과 문자 운용의 실제 모습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출토된 목간 중에, 습서목간[習書木簡]이라고 불리는 부류가 있습니다. 주로 『論語』와 『千字文』에 의한 것이 눈에 띄는데, 그것들을 문자
학습의 텍스트로 해서 같은 글자를 여러 번 써 본 것으로, 즉 글자를 연습했다고 생각되는 목간들입니다. 거기에서 문자
학습의 실제를 역력히 볼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열거해 봅니다(図2→p.10).
a |
|
糞土墻墻糞墻賦 |
(藤原京跡出土) |
b |
<表> |
子曰学而不□□ |
(藤原京跡出土) |
<裏> |
□水明□□ |
c |
|
慮慮慮慮逍□ |
(藤原京跡出土) |
d |
<表> |
池池天地玄黄
宇宙洪荒日月
霊亀二年三月 |
(平城京跡出土) |
<裏> |
(略) |
e |
|
売売売売売
買買買買買買 |
(平城京跡出土) |
같은 글자를 몇 번이나 쓴 e는, 「売買」라는 숙어를 연습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특별히 무언가를 토대로 해서 쓴 것은 아닌
듯 하지만, 나머지 예는 모두 『論語』와 『千字文』에 의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됩니다.
a는, 『論語』公冶篇「糞土之墻不可杇也」라고 하는 한 구절을 기초로 하고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의 의미는 「썩은 흙으로 쌓은 담은 덧칠도
할 수 없다」라는 뜻인데, 근성이 썩은 인물에게는 교육도 소용이 없다고 하는, 제자 宰予[→성은 宰, 이름은 予, 자는
子我. 공자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에 대한 비판의 말입니다. 굉장히 강렬한 말이지요. 선생의 한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음을 실감합니다. 마지막의「賦」라는 글자는 이 줄에는 보이지 않지만 이 바로 앞줄에 나오는 글자임을, 도노
하루유키[東野 治之]「『論語』『千字文』과 藤原宮木簡」(『정창원문서와 목간의 연구』)가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한 「糞」도
「墻」도 일반적으로 보이는 자형과는 다릅니다. 이체자[異体字]라고 하는 것인데, 활자의 자형규범과는 다른 자형의식 속에
있었다는 것을 알아 주십시오.
B도, 앞면은 『論語』為政篇의 유명한 일절 「子曰学而不思則罔 思而不学則殆」에 의한 것이지요. 무턱대고 책을 섭렵하는 것만으로 사색하지 않으면
혼란에 빠질 뿐이고, 그저 사색하는 것만으로 독서하지 않으면 독단에 빠진다는 뜻으로, 공자의 학문론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C는, 『千字文』의 「散慮逍遥」(마음속의 근심을 풀고 자유롭다는 뜻)라는 구를 쓴 것으로 보입니다. D의 「天地玄黄宇宙洪荒日月」는, 『千字文』의
첫머리 그대로입니다. 원래는「日月」에서 「盈昃」으로 이어지는데, 도중에 끊겨 있습니다. 『千字文』은 그 제목대로, 기본이
되는 천 글자를 사자성어로 짜맞추어 외우기 쉽게 만든 학습텍스트입니다. 「天地玄黄 宇宙洪荒 日月盈昃」은 「하늘은 검고
땅은 누르다. 공간과 시간은 광대하며 망막하다. 해와 달은 차면 기운다」라는 뜻입니다. 이것이 잘 만들어진 텍스트라서
고대로부터 오랫동안 초보적 교과서로서 가치를 지녀 왔습니다. 본문 뿐만 아니라, 일찍부터 주석을 달아서 여러 가지 텍스트를
관련시키면서(예를 들어 「天地玄黄」의 주는 『易』『老子』를 빌어 설명합니다. 주의 의미에 대해서는 후술) 배우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참고로 「霊亀二年」은 716년에 해당합니다.
『論語』나 『千字文』을 토대로 써 있는 목간은, 이 밖에도 많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 의미에 대해서는, 도노 하루유키 씨의 전게논문「『論語』『千字文』과
藤原宮木簡」이 명쾌하게 가르쳐 줍니다. 두 가지 책은 동아시아 고전고대 세계에서는 처음으로 배워야 하는 텍스트였다고.
『論語』는 말할 것도 없이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해야 할 책이고, 『千字文』은 문자 학습을 위해 만들어진 텍스트입니다.
초급독본을 토대로 한 문자학습의 모습을 바로 이들 목간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학습방법은 중국에서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문자는 한 글자씩 따로 떼어 외우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텍스트의 학습과 함께 배우도록 하는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즉 문자의 습득이라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교양을 공유하는 것에 이르게 되며, 거기에 하나의 문화세계로서 성립하는 기반이 있었음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
|
|
|
4 자서
읽기 쓰기의 현장이라고 했을 때 잊어버리면 안되는 것은, 자전[字書], 유서[類書], 사화집[詞華集], 그리고 주[注]의 의미입니다. 교양과
지식과 그 운용을 실제로 책임지고 있는 읽기 쓰기의 기반으로서, 이들의 역할은 더없이 중요했다고 하는 점에 주의하고
싶습니다.
우선, 자전은 자형[字形] 자의[字義] 자음[字音]에 의해 문자를 분류하고 해설한 것인데, 지금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玉篇』입니다. 6세기
중엽 남조의 梁代에 만들어진 책입니다. 『大広益会玉篇』이라고 하는 같은 『玉篇』이라는 이름의 자전이 현재 전해지고 있으나,
이는 후대에 크게 개변된 것으로, 고대의 문제로서는 현재로서는 전해지지 않는 원래의 『玉篇』에 대해 생각해야 합니다.
다만 원본이라고 해도 성립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개변되어, 전래된 책은 원본이 아니었으므로, 정확히는 原本系『玉篇』이라고
불러야 하겠습니다. 이 자전의 특징은 수록된 글자수가 많고, 선행 자전을 끌어와 여러 책으로부터 원문을 인용하는 체재로
되어 있습니다. 요컨대, 원전에 의하지 않고도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편리한 점 때문에 널리 이용되었던 것입니다.
다행히도 일부이기는 하지만, 원본계『玉篇』의 잔권이 고잔지[高山寺]와 이시야마데라[石山寺]에 남아 있습니다. 그로써 원래의 모습을 살피는
것이 조금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이하의 예를 보십시오(図3→p.13). 서로의 예가 상호참조를 구하고 있다는 점은
바로 알 수 있겠지요.
謡 |
与昭反。毛詩、我歌且謡、伝曰、徒歌曰謡。韓詩、有章曲曰歌無章曲曰謡。説文、独歌也。 |
歌 |
古何反。説文、咏歌也。或為謌字。在言部。古文為哥字、在可部。 |
謌 |
葛羅反。尚書、謌詠言。野王案、礼記、謌之為言也説之故言々之々不足故長言之。毛詩、我謌且謡、伝曰、曲合楽曰謌。或為歌字、在欠部。古文為哥字、在可部。 |
哥 |
古何反。説文声也。古文以為歌字。野王案、尚書、歌詠言、是在欠部。或為謌字、在言部。 |
「謌」의 항에 있는 『礼記』의 인용은, 도판에는 「説文」으로 되어 있지만, 「文」은 「之」의 오자이므로 정정했습니다. 자형이 비슷하기 때문에
틀린 것입니다. 위 예들을 보면, 「謡」의 항에 「毛詩」「韓詩」를 인용하고 있고, 그에 따라 「歌」와 「謡」가 대비적임을
제시합니다. 「謡」는 「徒歌」이며, 「韓詩」에 의하면 「章曲」이 없는 것, 즉 악기를 동반하지 않고 노래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独歌」라고, 「説文」에 의해 확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에 비해, 악기에 맞추어 노래하는 것을
「歌」라고 설명합니다.
그 대목에서부터 「歌」에 관련시켜 살펴 가는 것은 간단합니다. 「歌」를 보면,「謌」도 「哥」도 동일하다고 설명합니다. 게다가 「謌」에서는
「歌」「哥」로, 「哥」에서는 「歌」「謌」로 가서 참조하도록 하는 형태로, 삼자 비교대조를 상호간에 구하고 있습니다.
그 비교 안에 「尚書」와 「毛詩」가 반복하여 등장합니다. 그것을 「歌」에 관한 기본문례로서, 글자체가 통용한다는 사실과
같이 배우는 셈입니다. 「謌」의 항에서, 「謡」와 대비를 이룬다는 점을 「毛詩」 및 그 주석인 「伝」을 끌어와 설명하는
것은 「謡」의 항과 마찬가지입니다. 한편, 「野王案」이란 『玉篇』의 편자 顧野王의 코멘트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 글자씩 떼어 보는 것도 가능함과 동시에, 상호관련 속에서(이는 다른 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본적인 문제를 『毛詩』와 그 「伝」등에
의해 파악하는 것이, 원전에 의하지 않고 바로 여기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참고로, 이 『毛詩』의 문장은 「国風」중의 「魏風」「園有桃二章」의 노래 첫부분에 해당됩니다.
園有桃 |
뜰에 복숭아가 있으니 |
其実之殽 |
그 열매를 따 먹고 |
心之憂矣 |
마음에 근심이 있으니 |
我歌且謡 |
나는 노래하고 또 노래하고 |
|
(이하 생략) |
대강의 뜻은, 뜰에 복숭아가 있으면 따 먹고 마음에 근심이 있으면 노래하고 또 노래한다는 것인데, 그 중의 「歌且謡」에 대해 「伝」은 「曲의
楽에 맞추는 것은 歌라 하고, 徒歌를 謡라 한다」라고 주를 달고 있습니다.
『玉篇』은, 그 「伝」의 주를 「謡」와 「歌」의 항에 각각 나누어 인용한 것입니다. 인용은 비록 나뉘어져 있지만, 『毛詩』와 그 「伝」의
기본에 대해서는 능률적으로 배울 수 있는 구조입니다.
그러나 글자의 뜻만을 알고자 할 때는 이러한 방법은 필요 이상으로 돌아가는 길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는 그 때문에 간략판을 만들게 됩니다.
구카이[空海→弘法大師. 774~835. 일본진언종을 개조]가 편찬한 『篆隷万象名義』(図4→p.15)는 원본계『玉篇』을
반절과 자의만으로 줄였다고 하는 책인데, 예를 들면 「謡」는,
謡 与照反。独歌。
라고 설명하는 정도입니다. 이는 이 나름대로 대단히 효율적이고 쓸모가 있었다고 하겠지만, 질적으로 다른 책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여기서 원래의 『玉篇』이 지녔던 교양학습적인 의미를 재인식할 수 있겠습니다.
|
|
|
|
5 유서, 사화집
유서와 사화집은 필수로 배워야 할 실작예문집이라는 점에서, 자전보다 운용면에서는 실용적이고 중요했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玉篇』이
예로 드는 용례도 문장례라고는 하지만, 그 규모로도 질적으로도 차이가 있습니다).
유서는 주제별로 다양한 서적으로부터 기사를 모아, 이른바 짜깁기한 것입니다. 어느 사항에 대해서, 그것이 어떤 서적에 어떤 형태로 실려
있는지, 그에 관련되는 詩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등을 알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이 열도에 전해오는 것으로서는,
『日本国見在書目録』(9세기말, 당시에 현존하는 한적의 목록 기록)「雑家」부에 의하면, 『華林遍略』620권, 『修文殿御覧』360권,
『類苑』120권, 『芸文類聚』100권, 『翰苑』30권, 『初学記』30권 등의 서적명이 보입니다. 『北堂書鈔』160권의
이름은 없습니다만, 당시 확실히 전래되어 있었다고 이미 증명이 되어 있습니다. 문자세계의 형성에 있어서 이들의 역할은
상당히 큰 것이었습니다.
현재 남아있는 것은 『芸文類聚』『初学記』『北堂書鈔』, 이 세 가지 뿐입니다. 규모도 물론 다를 뿐더러 각각의 유서마다 특색이 있어서, 마치
오늘날 용도에 맞게 다양한 사전이 존재하는 상황과 비슷합니다. 유서는 지식과 교양을 익히기 위한 절호의 학습사전이었던
셈입니다.
이러한 특징을 실감하자면 실제로 보는 수밖에 없으므로, 이 책들의 분류목차를 일람화하여 제시하고, 아울러 天部의 권두기사(図5~7→pp.17~19)를
소개하기로 하지요.
『北堂書鈔』 |
帝王、后妃、政術、刑法、封爵、設官、礼儀、芸文、楽、武功、衣冠、服飾、舟、車、酒食、天、歳時、地 |
『芸文類聚』 |
天、歳時、地・州・郡、山、水、符命、帝王、后妃、儲宮、人、礼、楽、職官、封録、治政、刑法、雑文、武、軍器、居処、産業、衣冠、儀飾、服飾、舟車、食物、雑器物、巧芸、方術、内典、霊異、火、薬香草、宝玉、百穀、布帛、薬、木、鳥、獣、鱗介、虫豸、祥瑞、災異 |
『初学記』 |
―天、歳時、地、州郡、帝王、中宮、儲宮、帝戚、職官、礼、楽、人、政理、文、武、道釈、居処、器物、宝器、果木、獣、鳥・鱗介・虫 |
각각의 유서의 특색은 도판을 보면 알 수 있듯이,『北堂書鈔』는 하나의 사항에 대한 숙어와 단문을 열거해 가는 체재입니다. 내용면에서는,
제왕부 20권(『芸文類聚』제왕부는 4권, 『初学記』제왕부는 1권뿐)을 비롯하여 정치제도에 편중되는 점이 있고, 詩나
賦에 대한 실작례는 갖추고 있지 않습니다.
그에 반해, 『芸文類聚』는 사항 설명에 이어서 詩・賦를 중심으로 賛・銘・碑・序・表 등에 이르는 풍부한 실작례를 들고 인용하고 있습니다.
『初学記』는 권수를 줄인 간략판 같은 것인데, 「事対」(고사성어의 대구)의 항목을 세워 그에 걸맞는 실작례를 통해 시문 제작에 대비하는
등, 실용성을 중시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것들 뿐만 아니라 『修文殿御覧』등과 같이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유서들도 시야에 넣지 않으면 안됩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보면, 다음의
『日本書紀』神代의 모두부분이 창세신화를 음양론적으로 푸는 것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古天地未剖、陰陽不分、渾沌如鶏子、溟涬而含牙。及其清陽者、薄靡而為天、重濁者、淹滞而為地、精妙之合摶易、重濁之凝竭難。故天先成而地後定。
「하늘과 땅이 아직 갈라지지 않고 음과 양이 갈라지지 않은 혼돈 속에서, 맑고 가벼운 것은 올라가 하늘이 되고, 무겁고 탁한 것은 응결되어
땅이 되었다. 맑고 미세한 것은 모이기 쉽고 무겁고 탁한 것은 굳어지기 어렵다. 그래서 먼저 하늘이 생기고 그 후에
땅이 이루어졌다」는 것인데, 이 문장은 천지창조를 설명하는 『淮南子』나 『三五暦紀』를 그대로 가져와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이외에 세계의 시초같은 것을 쓸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단, 『三五暦紀』이란 책은 당시 직접 볼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습니다. 『芸文類聚』에 의한 것이라고 추정하는 설도 있습니다만, 현재로서는 『修文殿御覧』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고노시, 1992년).
『修文殿御覧』은 실물은 전해지지 않으나, 10세기 말 송대의 『太平御覧』(1000권)이, 이를 계승한 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원래부터
대규모이며 유서의 대표격으로 불리는 『太平御覧』이지만, 『修文殿御覧』과의 관계라는 점에서도 유의하고 싶습니다.
학습사전이라고 강조하였듯이, 이 유서들은 서적의 원본 그 자체를 읽지 않고도 효율적으로 지식을 축적하고 교양을 쌓을 수 있는 역할을 해
냈던 것입니다.
게다가 실용이라는 측면에서, 읽기 쓰기를 할 때 바로 직접 그대로 가져다 쓸 수 있는 문례의 길잡이 내지 참고서가 되어 주었다는 점이 주목됩니다.
『日本書紀』의 모두부분이 『修文殿御覧』에 의한 것이라고 했지만, 『日本書紀』 전체로 보면 『芸文類聚』에서 가져다 쓴
부분이 많고, 이 점은 고지마 노리유키[小島 憲之]『상대일본문학과 중국문학 上巻』에 의해 이미 검증된 바입니다. 결국
문자를 가지고 무언가를 쓴다고 하는 것은 처음에는 그런 식으로 시작되어 비로소 가능해졌다고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사화집(앤솔러지)도, 그대로 바로 쓸 수 있다는 점에서는 유서와 동일합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이, 周代에서 梁代까지의 시문의
진수 약 800편을 모아놓은 『文選』(30권)입니다. 『枕草子』[마쿠라노소시→平安시대 중기인 약 10세기에 궁녀 清少納言이
집필했다고 전하는 수필. 일본 3대수필의 하나]에도 「文은 文集, 文選」이라고 했지만, 8세기에 있어서 그 존재는 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文選』은 사화집이란 것을 그 제목에서부터 선언하며, 賦・詩를 비롯해서 騒・詔・令・表・書・序・論 등등, 다양한 문체의 작품을 엄선하여 편집했습니다.
이러이러한 것은 이런 식으로 쓰는 것이라는, 이른바 장대한 견본집이라고 하겠습니다. 더구나, 예를 들어 賦에 포함되는
주제들을 京都부터 시작해서 紀行・遊覧・江海・物色・鳥獣・哀傷・音楽・情 등등 나열해 보면, 이미 자명해졌듯이, 사항이나
사물을 골라내어 보여주는 그 전체가 이 세계에 존재하는 만물의 표상이 되는 것입니다. 詩에서도 다양한 주제가 전개됩니다.
献詩・公讌・詠史・遊覧・詠懐・哀傷・贈答・行旅 등 있을 수 있는 모든 장면의 詩를 열거하는 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세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詩로써 망라한다는 것입니다. 세계 안에서 생각할 수 있는 모든 테마를 그야말로 백과전서식으로 표명하는
것이며, 배우는 쪽의 입장에서 보면, 갖가지 장면에 대응하여 필요한 것을 알고 또 그대로 사용할 수도 있는 학습사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文選』에 달려 있는 주에도 주목했으면 합니다. 7세기 중엽에 李善이 주를 단 『文選』의 텍스트가 『日本国見在書目録』에 실려 있습니다.
정확히는 「文選六十巻 李善注」라고 되어 있습니다. 권수에서 알 수 있듯이 대단히 방대한 양의 주석인데, 그 주를 다는
방법은 오로지 해당 표현에 관한 용례를 여러 서적에서 인용해 오는 것입니다.
嵆康의 「琴賦」(제18권에 수록)를 예로 들어 봅시다. 서문에서 「衆器之中 琴徳最優」(여러 악기 중에서 거문고의 덕이 가장 뛰어나다)라고
하면서, 그 거문고에 대해 논합니다. 거문고의 재료가 되는 「椅梧」(의나무와 벽오동)가 자라는 장소에서부터 논하기 시작하는데,
그 부분을 봐 주십시오(図8 李善注『文選』→p.22). 본문과 주 중에서 주의 분량이 더 많을 정도입니다. 먼저 본문만을
뽑아 보겠습니다.
우선, 본문만 꺼내 둡니다.
惟椅梧之所生兮、託峻嶽之崇岡。 |
|
披重壌以誕載兮、参辰極而高驤。 |
|
含天地之醇和兮、吸日月之休光。 |
|
鬱紛紜以独茂兮、飛英蕤於昊蒼。 |
|
夕納景于虞淵兮、旦晞幹於九陽。 |
|
経千載以待價兮、寂神跱而永康。 |
|
대강의 뜻은 「오동이 자라는 곳은 험한 산의 높은 언덕이며, 대지를 박차고 올라 북극성에 닿을 정도로 높이 치솟아 있다. 천지의 순화의
기를 품고 일월의 빛을 흡수해서, 울창하고 무성하여 꽃을 하늘에 날린다. 저녁에는 그림자를 우연의 못에 드리우고 아침에는
줄기를 태양에 마르게 하여, 천년 동안 그 가치를 사 줄 이를 기다리며 조용히 신과 같이 그 자리에 서서 오래도록 평온하게
보낸다」라는 것입니다. 장소에 대한 설명이 더 이어지지만, 여기에서 끊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李善注가 어떤 식으로 달려있는가 하면, 결코 문맥이해나 해석을 제시하는 것이 아닙니다. 「椅」에 관해서는 「毛詩」와 그 「伝」을,
오동과 거문고에 관해서는 「史記」를, 「誕」의 훈에 관해서는 「毛詩伝」을, 「辰極」에 관해서는 「爾雅」를, 「驤」의
훈에 관해서는 「尚書伝」을, 제 3구 전체에 대해서 「周易」을, 「蕤」에 대해서 「説文」을, 「虞淵」에 대해서 「淮南子」와
그 주를, 「幹」「九陽」에 대해서 「楚辞」와 그 주를, 「待價」에 대해서 「論語」를, 각각 주요용례로서 들고 있습니다.
거문고의 소재 오동나무에 대해 논해진 이야기와, 거기에 주석으로 덧붙여 모아진 이야기에서 파생되어 가는 지식이(원전을 보지 않고 얻는 지식입니다)
같이 작용하여, 교양과 표현의 본보기를 일거에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사화집이 곧 다양한 학습사전이 되는 것입니다.
|
|
|
|
6 大伴旅人의 편지와 藤原宇合의 시에 관련하여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학습에 의한 교양의 영위와 더불어 비로소 최초의 쓰는 행위 읽는 행위가 있을 수 있었고, 그 이외의 방법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는 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실제의 장면에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万葉集』[만요슈→7세기 후반에서 8세기 후반에 걸쳐 편찬된, 현존하는 일본의 최고 가집]에 나오는 오토모노 다비토[大伴
旅人→665~731년. 奈良시대 초기의 정치가이자 궁정가인]의 서간과, 『懐風藻』[가이후소→751년의 서문을 갖는,
현존하는 최고의 일본한시집]에 실려있는 후지와라노 우마카이[藤原宇合→694~737년. 奈良시대의 정치가]의 한시를
보고자 합니다.
다음과 같은 다비토의 서간이란, 거문고를 보내는 데 거기에 덧붙인 편지입니다.
大伴淡等謹状
梧桐日本琴一面 対馬結石山孫枝
此琴、夢化娘子曰、余託根遥嶋之崇巒、晞幹九陽之休光。長帯烟霞、逍遥山川之阿、遠望風波、出入雁木之間。唯恐百年之後、空朽溝壑。偶遭良匠、×為小琴。不顧質麁音少、恒希君子左琴。即歌曰、
伊可尓安良武 日能等伎尓可母 許恵之良武 比等能比射乃倍 和我摩久良可武(八一〇)
僕報詩詠曰
許等々波奴 樹尓波安里等母 宇流波之吉 伎美我手奈礼能 許等尓之安流倍之(八一一)
琴娘子答曰
敬奉徳音。幸甚々々。片時覚、即感於夢言、慨然不得止黙。故附公使、聊以進御耳。謹状。不具。
天平元年十月七日、附使進上。
謹通 中衛高明閣下 謹空
츠시마섬[対馬]의 오동으로 만든 거문고를 「中衛高明閤下」, 즉 후지와라노 후사사키[藤原 房前→681~737년. 飛鳥시대부터 奈良시대 초기에
활동한 정치가]에게 보낸다고 하면서 거문고에 붙인 편지입니다. 노래도 2수가 들어 있고, 진상하는 말투입니다. 조금 기교를
부린 표현인데, 꿈에 거문고가 소녀가 되어 나타나서 「멀리 떨어진 츠시마섬의 높은 산에 뿌리를 내리고 백년 후에 덧없이
골짜기 밑으로 떨어져 썩어갈 것을 두려워 하였으나, 마침 거문고가 되었기에 군자의 곁에 두어지기를 바라나이다」라고 하며
노래하기를, 「어떠할까요……(언젠가는 거문고 소리를 알아 주실 만한 분의 무릎에 놓여지게 될까요)」. 그래서 「말 못하는……(비록
나무라 할지언정 필시 훌륭한 분의 애용을 받게 될 것이다)」라고 답하였더니 거문고 소녀가 기뻐하더라고 하며, 그 거문고를
진상한다는 내용입니다. 말하자면 후사사키야말로 거문고를 가질 만한 「기품 있는 분」이라는 뜻을 전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는
생략했습니다만, 이 뒤에 후사사키의 답장도 실려 있습니다.
거문고의 소재인 오동에 관한 표현은, 모든 주석서들이 다 지적하는 것처럼, 전술한 「琴賦」를 그대로 사용했음이 분명합니다. 즉, 「託峻嶽之崇岡」「吸日月之休光」「旦晞幹於九陽」을
적절히 짜 맞추어 「託根遥嶋之崇巒 晞幹九陽之休光」이라는 작문이 나온 것입니다. 거문고의 소재에 대해서는 이렇게 쓰는 것이라고
하는 문례로서 사용한 것이지요.
애당초 어떠한 경우에 어떻게 써야 한다는 것을 공유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의사소통의 전제가 없으면, 당연히 쓰기도 읽기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편지란 이런 식으로 쓰는 거라고 할 때 비로소 공유되는 기반(그야먈로 교양)이 필요합니다. 이 열도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동아시아 문화세계 안에서 처음으로 그것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한편, 우마카이의 시의 경우는 「悲不遇」라는 제목입니다.
賢者悽年暮。明君冀日新。 |
|
周日載逸老。殷夢得伊人。 |
|
搏挙非同翼。相忘不異鱗。 |
|
南冠労楚奏。北節倦胡塵。 |
|
学類東方朔。年余朱買臣。 |
|
二毛雖已富。万巻徒然貧。 |
|
명군으로 칭해졌던 太公望(逸老)・傅説(伊人)를 언급하면서(3구와 4구), 鐘儀・蘇武처럼 고절하기를 여러 번(7구와 8구), 東方朔・朱買臣의
경우를 예로 들어 40살이 넘도록 보답받지 못한 일생을 한탄(9구와 10구)한다고 하는, 고사에 빗댄 표현이 넘쳐나는 시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지식을 과시하기(패던트리, 현학적인 것) 위함이 아닙니다. 자신의 불우한 상황을 호소하는 것을 이러한 형태(내지는 패턴)로밖에
말하지 못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식으로 표현했다고 해서, 우마카이가 본인의 불우한 상황을 아주 강하게 의식했다고 해석하는
것은 과연 타당할까요. 어디까지나 이것은 발상의 양식이자, 신세한탄을 하는 하나의 스타일에 의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그러한 고사를 둘러싼 교양이 대체 어떻게 공유되었는가. 원래의 출전을 밝히자면, 『史記』(太公望・傅説), 『春秋左氏伝』(鐘儀),
『漢書』(蘇武・東方朔・朱買臣)등이 될는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다중적이고 복선적인 여러 학습의 경로를 통해 만들어진
교양의 세계였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쩌면 자전을 통해서였을지도 모르고, 유서들을 통해서 얻은 지식일지도 모릅니다.
이것저것 할 거 없이 그 모든 것이 문자의 문화세계를 만들고 있고, 그것을 서로가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시를
읽는 것도 가능했던 것이지요. 애초에 어떤 책에서 지식을 얻었는지 하는 등의, 출전을 찾는 것 자체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우마카이의 시에 나오는 朱買臣에 관련하여, 조금 더 생각해 보도록 합시다. 「나이는 朱買臣을 넘다」라는 표현은 이미 朱買臣의
나이를 지났다는 뜻입니다. 장작을 팔던 朱買臣이 부인에게까지 버림을 받았으나, 훗날 武帝에게 발탁되어 금의환향 했다고 하는
고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 출세한 연령이 『漢書』에 의하면 50세쯤이라고 전합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우마카이의
나이가 50을 넘지 않는 이상, 이 시의 한탄은 의미가 없는 셈인데, 실제 『懐風藻』에 의하면 우마카이는 몰년 당시 44세였다고
보여집니다. 이렇게 되면 「나이는 朱買臣을 넘다」라는 것은 그저 우마카이의 과장이 지나친 표현으로서 이해해야 하는 것일까요.
실은 『枕草子』에도 朱買臣의 연령에 대한 대목이 있습니다. 일본고전집성본에 의하면 제154단에 해당됩니다(『枕草子』는 수록된 전집에 따라
단의 계산이 조금씩 다릅니다).「미치타카 어르신의 거상중에」라고 시작되는 단의 이야기인데, 중궁 定子가 그 아비인 藤原道隆[후지와라노
미치타카→953~995년. 平安중기의 귀족으로 장녀 定子를 一条天皇의 중궁으로 들여 관백이 됨]의 거상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거기에서 「30의 시절을 다하지 못하고」라는 구를 음영한 藤原宣方을 혹평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불쾌한 宣方은 명가락으로
평판이 높은 斉信에게 가르침을 구해 그 흉내를 내어 구를 지어 옵니다. 게다가 언제나 집에 있으면서도 없는 체하더니 그
때부터는 면회를 허락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30의 시절을 다하지 못하고」는 어떠신지 하고 사람을 보내오자(즉
면회를 청해오자), 清少納言[세이쇼나곤→966~1025년. 993년경에 궁녀가 되어 定子를 모셨고, 훗날 『枕草子』를 집필]이
「그 시절은 훨씬 전에 지났지요. 이미 朱買臣이 부인을 깨우쳤다고 하는 나이이지 않습니까」라고 해서 그를 꼼짝 못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문을 들은 천황이 「확실히 宣方과 똑같은 39세의 나이에 朱買臣이 부인을 깨우쳤었지」라고 하며,
잘 받아쳤다고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朱買臣의 연령을 39세라고 하는 이 이야기의 출전은, 역시 『漢書』는 아닙니다. 이
점에 대해 일본고전집성본에서는 古注本『蒙求』를 가져와서 설명합니다.
『蒙求』는 唐代에 쓰여진 책으로, 고인들의 언행을 사자성어로 만들어 외우기 쉽도록 한 책입니다. 「蒙求」란 말은 아직 철없는 어린 아이의
요구에 응했다는 뜻으로, 초학자를 위한 입문서임을 자칭하는 것입니다. 상중하 3권으로 되어, 상고시대부터 남북조에 이르는
약 600명의 고사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朱買臣에 관한 고사는 「買妻恥醮」라고 실려 있습니다. 朱買臣의 부인은 남편을 버리고 재혼한 상태였는데, 태수가 되어 고향에 돌아온 朱買臣을
만나 수치를 참지 못하고 자살했다는 이야기를, 이 네 글자로 집약해 놓은 것입니다. 여기에 후대의 사람들이 계속 주를 붙여
왔습니다. 「買妻恥醮」의 경우 당연히 『漢書』를 가지고 주를 달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그 주를 포함하는 『蒙求』는
이를테면 전거가 달린 인물사전이나 다름없습니다. 원전을 보지도 않고 아주 손쉽게 고사성어를 학습할 수 있는 사전이 여기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宋代의 徐子光이 당시의 주를 정리한 소위 補注本『蒙求』가 현재 남아 있는데, 이에 따르면 역시 50세쯤에
출세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古注本에서는 『漢書』에 의한다고 하면서 이르기를, 朱買臣이 했던 말이 「予、年冊当富貴、今卅九」라고,
즉 내 나이 40이 되면 반드시 부귀영화를 누릴 터인데 지금은 39살이니 1년만 더 기다려 달라고, 그렇게 만류했는데도
부인이 듣지 않고 집을 나갔다고 설명합니다.
이 古注本의 설이라면 『枕草子』에 나오는 연령과도 이야기가 맞고, 우마카이의 시와도 부합됩니다. 다만 우마카이와 『蒙求』와는 시대적으로
맞지 않다고 하는 비판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우마카이의 몰년은 737년, 『蒙求』자체는 8세기 중엽의 당나라에서 만들어진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학습적 인물사전(이것도 일종의 유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은 그 이전부터 만들어지고 있었고,
일례로 『琱玉集』(『日本国見在書目録』에 의하면 15권. 육조 말기의 편찬으로 추정)과 같은 책이 전래되어, 비록 2권뿐이지만
현전하고 있습니다(중국에서는 이미 상실되어 전해지지 않습니다). 돈황 지역에서도 人事 중심의 유서인 『語対』가 발견되었습니다.
참고로 이 『語対』에는 「棄夫」라는 항목 안에 「買臣妻」가 실려 있는데, 여기서도 『漢書』에 의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40,
39라고 했던 古注本『蒙求』와 똑같은 연령 설정의 이야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면, 우마카이의 시의 배경이
된 것은 『蒙求』 이전에도 있었고, 비슷한 종류의 유서를 통해 얻은 교양이었다고 인정해도 되겠지요(그래도 『漢書』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학습사전과 같은 이러한 유서들이 존재했었고, 리얼 타임으로 이 열도에서도 그것들을 학습했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단지 「영향」이라든가 「출전」과 같은 말로 파악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할 뿐더러, 본질에서 벗어난 설명이라는 것을
이해하시겠지요. 그것은 교양을 공유하며 하나의 문화세계 안에 사는 것이었다고 말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
|
|
|
결어
지금까지 한자 한문에 의해 이 열도의 문화세계가 형성되었다는 점에 대해서 살펴 보았습니다. 읽기 쓰기를 하는 행위가 동아시아 고전고대 세계라고
하는 하나의 문화세계 안에서 이루어졌던, 그 실제 현장에 즉응하여 고찰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곧 하나로 이어진
교양의 기반에서, 학습에 의해 연결되고, 나아가 같은 문화세계에 살고 있다고 하는 로컬의 지향이었다고 결론 지을 수
있습니다. |
|
|
|
참고문헌
참고문헌沖森卓也・佐藤信『上代木簡資料集成』오우후우 출판사, 1994년.
国立歴史民俗博物館編『古代日本文字가 있는 風景』朝日新聞社, 2002년.
木簡学会編『日本古代木簡集成』東京大学出版会, 2003년.
長澤規矩也・阿部隆一編『日本書目大成 1』(「日本国見在書目録」)
汲古書院, 1979년.
『原本玉篇残巻』中華書局, 1985년.
董治安主編『唐代四大類書』(『北堂書鈔』『芸文類聚』『初学記』)
清華大学出版社, 2003년.
*『北堂書鈔』『芸文類聚』『初学記』는 단행본으로도 간행.
『文選』(李善注)은 복수의 출판사에서 간행.
小島憲之『上代日本文学과 中国文学 上』塙書房, 1962년.
東野治之『正倉院文書과 木簡의 研究』塙書房, 1977년.
西嶋定生『日本歴史의 国際環境』東京大学出版会, 1985년.
神野志隆光「『日本書紀』「神代」冒頭部와 『三五暦紀』」
(吉井巌編『記紀万葉論叢』)塙書房, 1992년.
東野治之『木簡이 말하는 日本의 古代』岩波書店(同時代라이브러리), 1997년(초판, 岩波新書, 1983년).
神野志隆光「文字와 말・「日本語」로 쓴다는 것」
(『万葉集研究』二一集)塙書房, 1997년.
神野志隆光『「日本」이란 무엇인가』講談社現代新書, 2005년. |
|
|
|
번역:裴寛紋[Bae Kwan-Mun]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