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 한・일 국제학술회의:발표자료
和歌의 정형과 도래인
우치다 마사노리[교토대학]
2007/9/29
 

 오늘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내용은, 7세기 일본(당시 중국에서는 倭国 – 멀고 먼 아득한 나라 - 라고 불리우고 있었음)에서 나타나는 정형시(단가라고 불리우는 5,7,5,7,7조의 음율을 가지는 和歌)가 성립되는 과정에 있어서, 당시의 일본 문화를 선진적으로 이끌고 있었던 도래인들이 어떻게 관여하였는가에 대한 것입니다.

 여기서 도래인이란 중국과 조선반도로부터 일본에 이주한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특히 이 시대에는 한반도 남부로부터 신라에 멸망한 백제사람들이 많이 망명했던 것 같습니다.

 원래 일본어를 발음 그대로 기록하는 것은 이러한 도래인들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하나하나의 음을 유사한 음을 가진 한자로 모사(模写)하는 기록 방법은, 중국에서 고대 인도의 산스크리토어로 기록 되어진 불교의 원문인 불전을 한역(漢訳)할 때에 사용되었던 방법이었습니다.

 그것이 고대 조선어에 그리고 고대 일본어에 응용된 것입니다. 일본의 오래된 자료 중에서도 고대 조선어의 음을 한자로 기록해 쓴 자료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일본어의 하나하나의 음에 유사한 음을 가진 한자로 모사하여 기록하는 방식, 즉 한 글자(一字)에 한 음(一音)이라는 표기형식이 조선반도를 경유하여 전해진 것은 틀림 없습니다. 물론 일본의 주요한 자료가 기록되어 있는 8세기에는 일본어의 음을 직접 표현하는 한자만으로 정리되어 있는 자료도 있습니다.

 그러한 일본어를 기록하는 방법에 의해 일본 고대의 노래가 쓰여진 것입니다.

 노래는 예부터 자연스럽게 전해져 내려 온 민족의 생활 감정의 본질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을 가요(歌謡)라고 칭합니다.

 수많은 古事記(고지키)와 日本書記(일본서기)에 기록된 전설들처럼, 일본어에 의한가요(歌謡)는 궁정 의식(儀式)을 통해 그리고 민간 안에서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이를 기기가요(記紀歌謡)라고 칭합니다. 그 중에는 짧은 5,7,5,7,7조의 음율을 가진 것들이 많습니다. 가장 알려져 있는 노래를 예로 들어봅시다.

八雲たつ 出雲八重垣 妻籠みに 八重垣作る その八重垣を
(뭉게 구름처럼 집 주위를 두른 出雲의 훌륭한 담장. 지금 새색시와 함께 살기 위해 만든 이 八重 담장. 아,아 그 멋진 八重의 담장.)

 이 노래는 高天原(일본 신화에서 하늘의 신이 있는 천상의 나라)에서 쫓겨 나온 須佐之男命(수사노오노미코토)가 지상의 出雲(옛날 나라 이름)에 내려와 큰 뱀에게 희생될 뻔한 처녀를 구하여 그 처녀와 결혼한다는 내용의 전설의 노래입니다.

 처음의 5,7조에서 八重垣를 제시하고, 다음의 5,7조에서 그에 대한 설명을 합니다. 마지막의 7조에서는 八重垣를 반복해서 끝을 맺습니다. 이 노래의 형식에 주목한 사람은, 아마도 도래인계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이 노래의 형식은『일본서기』25권의 孝徳天皇紀(코우도쿠천황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기에는 연호가 있었는데 대화(大化) 5년(649) 3월의 일입니다. 아버지 蘇我倉山田石川麻呂(소가노쿠라야마다이시카와마로)가 남에게 참소당하여 죽게 되자 황태자 中大兄皇子(나카노오오에노오우지)의 부인 蘇我造媛(소가노미야츠코히메-즉, 소가노쿠라야마다이시카와마로의 딸 )은 슬픔 끝에 죽고 맙니다. 그것을 애도하여 野中川原史満(노나카노카와라노후히토미츠)라는 인물이 황태자에게 노래를 바칩니다. 野中川原史満(노나카노카와라노후히토미츠)는 중국계 도래인 씨족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일본서기』의 원문을 예로 들어봅시다

耶麻鵝播爾 烏志賦拖都威底 陀虞毘預倶 陀虞陛屢伊慕乎 多例柯威爾  鶏武 其一
模騰渠等爾 婆那播左該騰摸 那爾騰柯母 干都倶之伊母我 磨陀左枳涅  渠農 其二

 한 글자(一字)에 한음(一音)으로 표기되어진 이 노래를, 다음과 같이 해석할 수 있습니다.

山川に 鴛鴦二つ居て 偶よく 偶へる妹を 誰か率にけむ  其一
(산천에 잉꼬 두 마리가 항상 사이 좋게 있었건만 함께 있었던 암수를 도대체 누가 데리고 떠나버렸는가.)

本毎に 花は咲けども 何とかも 愛し妹が また咲き出来ぬ 其二
(봄이 되어 나무들은 꽃을 예쁘게 피우건만 어째서 사랑스런 아내는 두 번 다시 이 세상에 살아 돌아오지 않는 걸까.)

 궁정가요나 민요풍 노래의 많은 기기가요 중에서, 두드러진 내용을 가진 두 수 구성의 노래입니다. 이 두 수(二首)는 황태자의 슬픔을 훌륭하게 대변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개인의 슬픔을 훌륭하게 표현한 노래는 이것 이외에, 9년 후의 斉明天皇(사이메이천황)이 손자 建王(타케루노미코)의 죽음을 슬퍼하며 노래한 육 수(六首)밖에 없습니다.

 이 노래들은 이미 가요(歌謡)에서 벗어난, 개인의 심정을 담은 내용의 단가 형식의 노래, 즉 ‘정형가’라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작자인 野中川原史満(노나카노카와라노후히토미츠)는 어떻게 해서 이런 노래를 만들게 되었을까요?

 실은 이 두 수(二首)에는 확실한 모델이 있습니다. 6세기, 중국이 남북으로 분열되어 있던 시대(남북조 시대), 북조의 시인인 庾信(유신) (513~581)이 쓴 「代人傷往二首」(대인상왕이수)가 바로 그것입니다. 庾信은 남조의 양粱 출신이지만, 전쟁으로 포로가 되어 북으로 끌려와 그 곳에서 문장 쓰는 일을 하였습니다. 귀환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고국에 대한 향수를 표현한 시를 쓴 것으로 이름이 알려져 있습니다. 「代人傷往二首」는 庾信(유신)이 부인을 잃은 어느 양반을 대신하여 슬픔을 읊어준 시입니다. 그것을 보시겠습니다.

代人傷往二首

青田松上一黄鶴、相思樹下両鴛鴦。
無事交渠更相失、不及従来莫作双。
雑樹本惟金谷苑、諸花旧満洛陽城。
正是古来歌舞処、今日看時無地行。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만, 첫 수(一首)는 「両鴛鴦」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이것은 상대를 잃은「一黄鶴」라는 것과 대비되어, ‘나는 실은 부부가 되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 했다’라고 후회를 하는 부분입니다.

 둘째 수(二首)는 옛날 번영의 땅에 나무들은 우거지고 꽃은 만개했지만, 이미 떠나간 옛 사람은 그 곳에 돌아오지 않는다고 한탄합니다. 이와 같이 代人傷往二首의 주제는 새나 꽃과 대비되어 부각시키는 구성이 비슷합니다. 또한, 造媛(미야츠코히메)의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에는, 첫 수(一首)째는 죽음이 다가온 것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둘째 수(二首)에서는 재생(再生)되는 자연과 대비해서 다시 돌아 올 수 없는 인간의 생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두 수(二首)의 구성은 중국 한나라 시대의 만가(挽歌)의 영향이라고 생각됩니다. 이 영향에 대해서는 제가 庾信(유신)의 시와의 대응을 논하기 약 10년 전에 이미 이 곳에 계신 미사키씨가 논한 바 있습니다. 庾信(유신)의 시도, 그 반가의 계열의 것입니다.

 이 내용을 和歌에 대입하여 노래한 것이 가요(歌謡) 중에서도 많이 사용되었던 5,7,5,7,7조의 음율인 것입니다. 이것은 「八雲たつ」의 노래처럼 5,7조, 5,7조를 전개하고 한번 더 7조를 반복해서 끝을 맺는 단순한 형식이었던 것입니다. 그 중에 만가의 내용을 함축시킨 감각은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倭語(일본어)가 모국어였다면, 단순하게 자연스런 형식의 음율이라고만 했겠지요. 일본어가 외국어였던 도래인의 환경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倭語에도 능숙했겠지요.

 일반적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문화의 일반적인 영향이 아니라, 이처럼 노래의 내면에 이르기까지 도래인을 언급한 사실을 일본에서는 그다지 수용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저도 그것이 전부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립되어진 그 형식을, 진정한 일본의 정형가로 발전시킨 것이 柿本人麻呂(가키노모토노히토마로)이라는 것은, 널리 인정받고 있고, 그 방법이 계속해서 논해지고 있습니다. 이 곳에 계신 두 분, 코우노시씨와 미사키씨는 그 분야에서 일본을 대표하는 연구자입니다. 일본의 정형가가 성립된 그 때, 일본의 음율을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그리고 그 배경으로는 중국의 시에 대한 이해가 있었음을 저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번역:金知英[Kim Ji-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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